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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 장자천(長芝川).원천천(遠川川).수원천(水原川)이 남류해 황구지천에 합류한 뒤남류한다. | *하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 장자천(長芝川).원천천(遠川川).수원천(水原川)이 남류해 황구지천에 합류한 뒤남류한다. | ||
*지질구조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 *지질구조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 ||
− |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ºC, 1월 평균기온 -5.6ºC, 8월 평균기온 26ºC이며, 연 강수량은 1,327mm이다. 10월 초에 첫서리가 | + |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ºC, 1월 평균기온 -5.6ºC, 8월 평균기온 26ºC이며, 연 강수량은 1,327mm이다. 10월 초에 첫서리가 내리고 4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가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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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인문지리== | ==수원의 인문지리== |
2023년 6월 14일 (수) 01:05 판
수원의 개요
수원시는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시이며 동북쪽과 동쪽은 용인시, 서쪽과 남쪽은 화성시, 서북쪽은 의왕시에 접하고 있다. 수원 행정구역으로는 4개 구, 42개 행정동 (56개 법정동)이 있으며 시청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있다.
수원의 역사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 일대에서 토기·쇳조각·돌화살촉조각 등 청동기시대 전기로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이로써 청동기시대에 사람들이 집단생활을 영위했던 주거지로 밝혀졌다.
특히, 광교산과 꽃뫼의 산신제의 유습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모수국(牟水國)이 수원 일대였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점유하고 있던 5세기 말엽에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고구려의 매홀(買忽: 맷골, 물골)로 불렸다.
수원(水原)이라는 이름은 모수국이라는 데서 연유해, 볼물·벌물이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내려온다. 통일신라 때인 757년(경덕왕 16) 9주를 두고 군현으로 명칭을 고칠 때 수성군(水城郡)이라고 개칭하였다.
태조가 후백제를 치기 위해 남정(南征)할 때 군인(郡人) 김칠(金七)·최승규(崔承珪) 등 200여 명이 귀순해 왔다. 그 공으로 940년(태조 23) 수주(水州)로 승격되었다. 그 뒤 995년(성종 14)에는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하였다. 이때 이름을 한남(漢南) 또는 수성(隋城)이라 하였다.
1018년(현종 9) 지수주사(知水州事)를 두었고, 안산(安山)·정송(貞松)·용성(龍城)·영신(永新)·쌍부(雙阜) 등의 현(縣)이 내속되었다. 1271년(원종 12) 몽고병이 대부도에 쳐들어왔을 때 섬사람들이 몽고병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니 부사 안열(安悅)이 이를 평정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뒤에 인주(仁州: 지금의 仁川)에 붙였다가 곧 수주목으로 고쳤다. 1310년(충선왕 2) 목의 지위에 있는 모든 고을을 폐할 때 수원부로 강등되었다. 그 뒤 1362년(공민왕 11)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고을사람들이 이를 맞아들여 양광도에서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 그래서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이에 고을사람들은 재신 김용(金鏞)에게 뇌물을 바쳐 다시 부로 승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수원부가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되었으며, 1413년(태종 13) 도호부가 되었다. 1456년(세조 2) 진(鎭)을 설치하고 판관을 두어 서울의 수호를 튼튼하게 하는 보제도(輔制度)의 한 곳이 되었다.
1526년(중종 21) 고을사람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서 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진이 혁파되어 인천으로 옮겨졌다가 1535년에 다시 진으로 복구되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拜峯山)에서 수원 읍치의 진산인 화산(華山)으로 옮겼다. 그런 다음 이곳에 있던 읍치를 모두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이때 수원향교도 봉담면 와우리에서 옮겨 왔다. 그리고 1793년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華城留守府)로 승격시키고 유수로 하여금 장용외사행궁정리사(壯勇外使行宮整理使)를 겸하게 하였다. 또한 정약용(丁若鏞)이 활차(滑車: 도르래)로 거중기(擧重機)를 만들고 녹로(轆轤)를 사용해 각종 시설을 고루 갖춘 수원성을 쌓았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관제가 바뀌어 군이 되었다. 이듬해 경기도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가 1910년에 서울로 이전되었다. 이때 화령전(華寧殿)에 모셨던 정조의 진영도 서울로 옮겨가니 군민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수원군읍지』에 따르면 1899년의 호구 수는 1만 2579호, 4만 9708명(성내 956호)에 40면 449리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섬을 제외한 남양군을 폐합해 수원면이 되었다가 1931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3·1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약했던 교육가 김세환(金世煥)과 3·1독립운동과 항일민족운동에 몸바쳐 일하다 붙잡혀 복역한 이선경(李善卿)이 있다. 또한 서양화가·여류문학인이었던 나혜석(羅蕙錫)도 이 고장 출신이다.
1949년 8월 15일에 시로 승격됨에 따라 수원군의 다른 지역은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1월 1일 화성군의 20개 리를 편입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 있던 경기도청의 이전이 결정되어, 1964년 10월 15일 도 청사를 신축에 들어가 1967년 6월 23일 완공하였다.
기공 당시에 ‘수원시민의 날’을 제정하고, 이를 경축하는 화홍문화제(華虹文化祭)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는 효의 상징도시로서 전국 시·도에서 추천된 효행자를 표창하고 있다.
1983년 2월 15일 용인군 수지면 이의리와 하리를, 1987년 1월 1일 화성군 매송면 금곡리와 호매실리를 편입하였다. 1988년 7월 1일 권선구와 장안구를 설치했으며, 1993년 2월 1일에는 팔달구가 신설되었다.
1994년 12월 26일 화성군 반월면 일부와 태안읍 일부, 그리고 용인군 기흥읍 일부를 편입하였다. 그리고 1995년 4월 20일에는 화성군 태안읍 신리·망포리 일원을 편입하였다. 도청의 이전과 함께 각종 기관·단체의 이전으로 도 행정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2003년 11월 24일 영통구가 신설되었다.
따라서 많은 교육기관과 산업체를 유치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그리고 농업과학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동수원에 신도시를 형성, 개발해나가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출처: https://encykorea.aks.ac.kr/
수원의 자연지리
- 지형은 광주산맥의 발달부인 광교산맥이 통과해 곳곳에 높고 낮은 구릉이 나타난다. 동북에서 남서 방면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 하천은 광교산에서 발원한 장자천(長芝川).원천천(遠川川).수원천(水原川)이 남류해 황구지천에 합류한 뒤남류한다.
- 지질구조는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 기후는 연평균 기온 11ºC, 1월 평균기온 -5.6ºC, 8월 평균기온 26ºC이며, 연 강수량은 1,327mm이다. 10월 초에 첫서리가 내리고 4월 하순에 마지막 서리가 내린다.
수원의 인문지리
- 행정구역 및 인구현황
- 경제
- 교통
- 문화재
수원의 지도
- 고지도
- 근대지형도
- 현대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