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분수원
지명 유래
고려시대에 창건된 분수원(焚水院)은 불교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었으며, 스님들에 의해 운영·관리 되었다. 이 분수원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 중앙이 직접 그 운영과 관리를 담당하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까지 존재했다. 한편, 1656년 편찬된 『동국여지지』에 분수원(分水院)이라는 새로운한자 명칭이 등장했다는 점과 여러 사료 및 고지도에 등장하는 분수원의 한자 명칭 및 조선 시대 역원의 변천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니 분수원은 조선 전기에 통폐합되고, 그곳에서 근처 지역에 다시 설립 되었다. 또한 그러한 변화 속에 분수원의 기능과 역할이 변화하였다. 즉, 분수원이 민간 여행객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기능은 인근의 세류점에게 넘기고, 공적인 업무에 해당하는 역참의 기능과 임금이 행행할 때 머물던 주정소의 역할만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전기에 사라진 분수원(焚水院)은 『파주분수원산송전말』의 기록을 통해 보면 현 윤관 장군 묘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 중기에 다시 재건된 분수원(分水院/汾水院)은 일제가 1895년에 측량하고, 1899년에 제판한 전국 지도의 분수원 부근과 현재 항공사진을 비교해 보니 현 윤관 장군 묘역의 오른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윤관 장군묘역의 오른쪽인 여충사와 충효관 뒤편 숲속에 잡목으로 덮여 있는 곳에서 건설 석재와 함께 섞여 있는 옛 초석과 장대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조선 중기에 다시 재건된 분수원은 현재 여충사뒤편 숲속에 위치하면서 윤관 장군 묘역까지 포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즉위 전
조선 건국 후 태어난 첫 임금[* 초대임금인 할아버지부터 3대임금인 아버지까지는 고려때 태어났다.]으로,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당시 정안군[* 정비 소생을 대군, 빈 소생을 군으로 봉하는 제도는 태종 대에 완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차 왕자의 난 이전에는 군, 이후에는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정안군일 때 태어났다.]이었던 태종과 정녕옹주였던 원경왕후의 3남으로 태어났다. 장남 양녕대군 이전에도 3명의 아들들이 있었으나 유아기에 사망하여 세지는 않는다. 따라서 세종은 3남이다. 이는 세종실록 1권 총서에서 확인 가능하다.[공정 대왕(太宗恭定大王)의 셋째 아들]
이전 3아들이 요절한 경험이 있는 정안군과 정녕옹주는 양녕대군을 친정인 민제 집안에서 효령대군은 홍영리의 집안에서 길렀다. 대신 막내[* 당시 기준이다. 정안군과 정녕옹주는 이후 태종과 원경왕후 시절에 여러 남매를 더 생산한다.]인 충녕만 직접 길렀다. 흔히 여러매체에는 정안군과 정녕옹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하며 쿠데타를 계획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언급으론 정도전 등 일파에게 시달리고 나면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정안군과 정녕옹주가 충녕을 껴안거나 업어주고 무릎 위에 두며 살았다고 한다.[[1]]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독서광으로 병이 나 앓고 있을 때도 줄창 책을 읽으려 들었으므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 뒤에 숨겨뒀던 《구소수간(歐蘇手簡)》[* 송나라의 구양수와 소식이 서로 나눈 쪽편지를 모아 엮은 책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유실되었는데 한국에는 고려 때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라는 책 하나를 붙잡고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얘기는 알음알음 퍼져있는 이야기. 조선에서 왕위를 이을 세자는 왕이 되면 그만이지만 그 외의 왕자는 일개 왕실 종친일 뿐 능력을 이용한 정상적인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충녕대군의 재능이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